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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07-11 11:52
[문화쉼터] 벗이여 제발 -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조회 : 6,774  

장마가 채 가시기도 전에 태풍으로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기후의 변화로 옛날에 비해 강수량이 많지 않다는 뉴스를 들은 기억 때문인지 이번 비는 왠지 고맙게 느껴지는 비입니다. 이번 태풍으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게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말입니다.


주변을 보면 비가 내리면 옛 연인과의 추억이 생각난다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 비로 인해 젖어가는 풍경을 보면 그를 또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촉촉이 젖어갔던 기억이 되살아나나 봅니다. 그래서 ‘너를 사랑하듯 비는 내린다’ 라는 노랫말도 있나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옛 그림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는 풍경의 그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 비와 관련으로 연인과의 애틋함을 표현한 그림은 비단 산수화뿐 아니라 풍속화에서도 저의 일천한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비가 내리는 순간 보다는 비가 내린 후의 습윤한 분위기의 그림만 줄 곳 그렸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그림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입니다.


1751년, 종이에 수묵, 79.2 cm × 138.2 cm, 국보216호, 호암미술관


<인왕제색도>는 겸재가 76세 때 그림입니다. 겸재의 대표작들은 대부분이시기에 그려졌는데 <금강전도>와 <계상정거도>도 76세 때 그린 그림이니 겸재의 실력이 절정에 올랐을 때 그린 그림이며 개인적으로 정선의 그림 중 제일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인왕(仁王)은 서울에 있는 인왕산을 말하는 것이고 제색(霽色)이란 큰 비가 온 뒤 맑게 갠 모습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비 개인 인왕산 그림인데 인왕산은 산 전체가 백색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바위산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백색화강암을 그리려면 흰색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온통 진한 묵으로 그렸습니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붓으로 저렇게 그리려면 붓을 옆으로 뉘어 빗자루를 쓸어내리듯 그려야 하는데 그것을 묵찰법(묵색 쇄찰법)이라고 합니다. 깎아지른 절벽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부벽준과 비슷하지만 그려놓고 보면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그런 묵찰법을 한번이 아닌 몇 번을 반복하여 그렸기에 바위의 묵중한 중량감이 더욱 살아났습니다.


또 백색암석을 진한 묵으로 그려도 원래 색은 백색임을 느낄 수 있으니 만년의 겸재의 묵법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왕산을 직접 가까이에서 보면 백색바위가 백색으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바위가 비에 젖으면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솟구친 백색 화강암봉들의 독특한 색감은 이런 묵색 쇄찰법으로 쓸어내려야만 그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겸재는 인왕산 밑 인곡정사에서 살면서 수백 번, 수천 번의 연습과 실험에서 터득한 진경산수의 백미로 꼽힐만한 표현입니다.

<인왕산봉우리> 이래서 그렇게 그렸구나 하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듭니다.


버드나무, 소나무 등 갖가지 나무의 표현도 기교와 세밀한 표현을 배재한 채 속도감 있게 그려내 거친듯하면서도 기품 있고 장대한 우리나라 수목의 특징을 살려 진경산수의 맛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양 옆과 특히 인왕산 정상의 윗부분을 의도적으로 과감하게 잘라 산의 웅장함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좁은 종이에서 벗어나 더 높게 뻗어나갈 수 있는 상상의 여지를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처음부터 의도된 건 아니었습니다.

원래 이 그림의 상단에는 순조때 영의정까지 지낸 만포 심환지(1730~1802)의 칠언절구 제시가 있었습니다. 겸재 그림을 좋아하여 그림을 소장하면서 제시를 적어두었는데 워낙 검소해어 그런지 죽어서 초상화 하나 마련하지 못하여 심환지 후손들이 초상화 대신 조상의 글씨를 대신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이 나서 그런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팔려 이리저리 주인이 바뀔 때 제시는 없어졌고 그때 그림의 상단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다보면 감상자의 시선이 어느덧 자연스럽게 우측 앞에 있는 조그마한 집으로 모아집니다. 그림 감상에서 시선이 모아진다면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분명 화가가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림의 주제이자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저 집은 과연 누구의 집일까요? 그 의문을 풀어 가는데 단초를 마련한 분을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인 최완수 선생 이였는데 최완수 선생은 그림을 그린 때가 작품관지에서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신미년윤달 5월 하순' 에 그렸는데 정선의 60년 지기인 사천(槎川) 이 병연(李秉淵1671~1751)이 5월 29일에 죽었다 는걸 밝혀냈습니다.

그 후 오주석교수가 [승정원일기]에서 이 병연 사망 전후의 날씨를 확인했는데 19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줄 곳 비가 내렸고 25일 오후에 비로소 비가 완전히 개었다 는걸 밝혀냈습니다. 바로 <인왕제색도>는 이 병연이 죽기 4일전 25일 비가 개인 오후에 그렸다 는걸 증명한 것이고 기와집은 육상궁 뒷담 쪽에 있던 사천 이병연의 집(취록헌)임을 고증한 것입니다.


사천 이병연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요?

정선이 조선후기 진경산수의 거장 이였다면 사천은 일만 삼천수가 넘는 시를 지은 대문장가이자 진경시인이었습니다. 겸재와 사천은 10대부터 스승인 김창흡 아래 동문수학한 벗이였습니다.

각각 81세, 84세까지 장수하면서 한동네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며 자란 형제 같은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애틋했던지 겸재가 양천(지금의 서울 가양동) 현령으로 부임할 때 이병연의 전별시를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이 될 터인데

그림날고 시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진 보이누나

강서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 왕망천(당나라 문인이자 서화가 왕유)


한양에서 멀지도 않는 코앞에 있는 양천으로 떠나는 것인데도 이렇게 애절한 시를 남긴다니.

또 전별시와 더불어 둘은 시와 그림을 주고받길 굳게 약속합니다.


겸재와 더불어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는 약속이 있어서

기약대로 가고옴을 시작한다.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봄에

시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둘러 대니

누가 쉽고 어려운지 모르겠구나.

-신유 봄에 사천(槎川)


이렇게 주고받은 시와 그림을 묶어 놓은 서화첩이 바로 그 유명한 [경교명승첩]입니다.

[경교명승첩]은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조선 최고의 서화첩입니다. 그곳에 서로 시와 그림을 주고받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한 점 있는데 바로 <시와상간도(詩畵相看圖)>입니다.

<시화상간도> [경교명승첩]中 1740~41, 비단에 담채, 29 x 26.4 cm , 간송미술관

사천과 겸재가 마주앉아 시와 그림을 주고 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

서로 바로보는 표정이 오랫동안 함께했던 지기끼리만 나눌 수 있는 표정입니다.


그렇게 겸재 자신의 피붙이와 다름없는 사천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겸재는 60여년을 형제처럼 지내온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가 막힌 심정 이였을까요.

아마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며 하루빨리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나길 손꼽아 빌고 빌었을 것입니다.


바로 <인왕제색도>는 사천 이병연이 어두운 비구름이 개이듯 병이 나아 저 당당한 인왕산처럼 다시금 웅장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낸 그림입니다. 겸재가 사천의 집 주위를 수목들이 호위하듯이 빙 둘러 그려낸 것만 보아도 사천이 병을 이겨내고 당당한 소나무처럼 일어나길 바라는 겸재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속도감 있게 그린 수목이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수목을 그려 물크러져 보이는데 이것이 물기가 촉촉한 수목을 그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기법입니다.


이처럼 겸재가 지극한 마음을 담아 그렸기에 <인왕제색도>를 보면 산수화의 느낌을 넘어 절망 끝에서 피어나는 카타르시스의 분위기가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왕제색도>는 지금의 궁정동 칠궁 담장 너머에 있던 사천의 집(취록헌)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백악산 아래에 있는 사천댁 취록헌만 있으면 되었고 그 건너 인왕산 아래에 있는 겸재 집 인곡정사 사이에 많은 집들은 큰 의미가 없기에 안개 밑으로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앞 등성이에 육상궁 뒷담을 표현해 이쪽이 북악산록이란 것만 표시만 보더라도 궁정동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무지가 만들어낸 코미디 하나를 소개하자면 지금의 정독도서관에 가보면 <인왕제색도비>가 있는데 도서관에서 세운 비에 이곳에서 <인왕제색도>의 모습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아무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이곳에서는 인왕산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피 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근거도 없이 도서관에 기념비를 세워 놓은 공무원들의 무대포 정신에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겸재는 평생 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기량을 이 그림에 다 쏟아 부었던 것 같습니다. 묵색쇄찰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 사천 이 병연을 상징하듯 바위를 중량감 넘치게 그렸고 그러자니 토산과 먼 곳의 수목은 단조로운 피마준과 미점만으로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양성곽의 모습까지 세심하고 정성들여 그려 전체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한 점 흠잡을 데가 없는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의 분신 같은 사람이 병환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만 보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꼭 병이 아니라도 주변에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스러워하는 지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훌륭한 예술작품에는 반듯이 진실 된 휴머니즘이 녹아있다는 걸 보여주며 왜 명작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줄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인왕제색도>를 보면서 주변에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한 통 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니 직접 찾아가 만나서 손이라도 꼭 쥐어보면 어떨까요? 이 비가 개 이면 말입니다.

2006 . 7 . 11

금강안金剛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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