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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02-26 14:39
[공부나눔] 왜 아동도서 일러스트레이션에 주목해야 하는가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8,181  

왜 아동도서 일러스트레이션에 주목해야 하는가

계간미술 40호(1986년) 류재수(서양화가.일러스트레이터)

우리의 아동도서는 여러 형태의 시대적 변화를 겪으면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도서의 지질, 인쇄술의 발달 등 외형적 발전과 양적 팽창을 의미할 뿐 질적인 면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전히 과거의 피상적이고 비체계적인 내용의 연장선 위에 있으며,사회의 관심으로부터 거의 소외되어 있는 상태이다.

특히 아동도서에 수록된 일러스트레이션도 이러한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초기 도서들에 비해 조형적인 밀도가 오히려 퇴보하는 놀라운 현상이 허다하게 발견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미술계는 여전히 '어린이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분야를 경시하거나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전근대적인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일부 출판사와 젊은 일러스트레이터들에 의해 의욕적인 도서들이 선보이고 있으나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

근근히 이어져 온 명맥

주지하다시피 어린이 도서에 삽입된 일러스트레이션은 원문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러므로 원문의 설명적 단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우리 일러스트레이션의 문제는 '아동문학'의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아동 문학의 태동기인 192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해방을 거치면서 60년대까지는,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아동 문제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으므로 아동 도서의 종류와 질은 그만두고라도 그 절대량이 매우 적었다.

해방을 전후하여 나타나기 시작한 도서 중 일러스트레이션이 주가 된 것으로는 만화책과 거기에 약간의 형식을 달리한 그림이야기책(당시의 명칭) 정도였다. 이 적은 양의 도서를 검토해 보면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이 드러난다. 오늘날 조형의 추세가 서구지향적이듯, 신문화 자체가 일제하에서 그들로부터 이식된 것이므로 당시의 미술계 전체가 일본 화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거나 답습하는 한계 안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만화.삽화가들은 일본화풍의 영향을 받았으되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의 민족적인 분위기를 자유롭게 연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의 순수미술 사조가 예술지상주의를 표명하여 삶의 문제로부터 괴리되어 있었던데 비해, 만화나 삽화는 당시의 민중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해방된 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일본풍의 만화들이 판을 치는 풍토와 비교할 때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당시 만화들이 경제적.기술적 낙후성에도 불구하고 2-3도이 컬러로 인쇄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6.25동란을 겪고 사회가 나름대로 기틀을 잡아가면서 오히려 아동도서계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일어난다. 초기에는 순수 미술가들 중에 간혹 아동도서 일러스트레이션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있어서 직.간접으로 미술계와 연계되어 있었으나(그것이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50년대에 들어서 아동도서 일러스트레이션은 미술계로부터 완전히 소외당하게 된다.

그로부터 아동도서에 참여하기 시작한 새로운 작가들은 미술계로부터 격리되었고, 경박한 의미로서의 '만화가' '삽화가'라는 칭호를 듣는 등 박대받았지만 나름대로의 진지한 자세로 작품에 임했다. 지금도 그 때의 작가들이 상당수 활동하고 있다. 그들이 지금은 매너리즘에 빠져 경색되었다는 비판의 화살을 받고 있으나 그들에 의해 주도되어 아동도서 일러스트레이션의 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공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60년대까지의 도서에 그려진 일러스트레이션에 관한 한, 그들의 성실성과 함께 지금 봐도 손색없는 개성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이 곳곳에서 보여진다.

그림책의 형식을 제대로 갖춘 최초의 책은 60년대 초에 간행되었는데, 작품에 임하는 적극적인 자세,현장감 넘치는 주제의 설정과 조형적인 능숙함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다가 60년대 후반에 들어 그래픽 디자이너에 의한 동화 일러스트레이션이 전시회를 통해 처음 선보였고,70년대에 경제의 급성장과 더불어 아동도서 출판도 차츰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무성의하고 조악하게 그려진 마구잡이식의 일러스트레이션들이 군소 출판사들에 의해 양산되었다.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그래픽 디자인전을 통해 '어린이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이 산발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들은 대체적으로 어린이 입장에서 본 것이라기 보다는 어른들의 유희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디자인계 출신들에 의한 일러스트레이션들이 처음으로 어린 독자들의 손에 닿은 것은 80년대 초에 와서의 일이다. 이때부터 일기 시작한 아동도서붐을 타고 제작비를 대거 투자한 일러스트레이션 위주의 새로운 기획물들이 시중에 나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 일러스트레이터들과 신예 일러스트레이터들로 양대 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신예 작가들은 대개가 디자인계 대학을 갓나온 의욕적인 젊은 층들로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조금씩 보여주는 추세이다. 그러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대다수 일러스트레이션은 아직도 원문의 전근대적인 내용에 묶여,무성의하고 천편일률적인 묘사로 일관되어 있다.

비현실적 내용과 천편일률적인 묘사

일러스트레이션에 영향을 끼치는 원문과 함께 그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래동화의 경우, 각 시대마다 시대정신에 맞게 살아있는 내용들로 전승되어 내려오다가 근대화 과정에서 국권 상실로 그 맥이 끊어지면서 리얼리티의 상실을 가져왔다. 그리고 과거의 봉건적이고 유교적인 가치관과 현대의 가치관과의 격차가 생겨 오늘의 어린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 도를 넘어서고 있는 '역사이야기'나 '위인전'은 아직도 식민지사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며, 옛 성현들 거의가 성인화되어 있거나 초인간적인 인물로 과장되게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어린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본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숭배하게끔 하거나, 반대로 열등감을 조장하게 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한 원문에 영향을 받은 일러스트레이션 또한 마찬가지이다. 거의가 알렉산더와 같은 정복자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포즈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러한 지나친 영웅적 묘사와 함께 인물의 성격이나 표정이 모두 비슷한 표준형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잘못된 고증도 허다하며, 설사 복장.소도구 등의 외적 고증이 맞았다 하더라도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내적 고증인 역사적 인물의 현실적 묘사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에다 창작동화를 현실도피의 문학으로 인식하도록 오도하여 어린 독자들을 나약하게 만들어 왔다. 그리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주제들이므로, 어린 독자들이 이야기에 흥미를 잃고 나아가서는 책 자체를 기피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나마 어린 독자들의 흥미를 끌고 있는 외국 번역동화들의 경우, 과거 제국주의적 지배자들의 우월감 아래 씌어진 글들이 상투적인 도덕적 관념과 오락성으로 교묘히 위장되어, 피지배의 쓰라린 경험을 겪은 우리에게 아직도 고전이라는 표제를 달고 무비판적으로 읽혀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외국 번역 동화에 삽입된 일러스트레이션들은 대개가 원화에서 그대로 복사한 것들이며,나머지는 이곳 저곳에서 옮겨와 뜯어 맞춘 국적불명의 것들로 채워져 있다.

여러 유형의 원문에 삽입되어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조형상의 문제점을 묶어서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화면구성의 문제인데, 한마디로 천편일률적이다. 주인공과 보조인물의 위치와 크기, 나무와 집 등 배경의 위치는 정해져 있는 듯 규격화되어 있다. 시점도 고정되어 있어 장면마다 변화를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둘째는 형태묘사의 문제로서, 원문에 등장하는 인물의 다양하고 미묘한 성격과 관계없이 극히 몇 가지의 표준화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세째로 색채의 사용이 너무 상식적인 선에서 그치고 있다. 하늘과 물은 파랑색이고, 땅은 황토색, 나무는 한결같이 초록색으로 칠하는 식의, 채색 아닌 색메꾸기식의 타성에 젖어 있다.

마지막으로, 표현매체와 기법의 문제로서, 외국의 경우는 회화적, 그래픽적 기법이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으나 우리의 경우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피상적인 묘사 외에도 저질 상업주의에 영합한 조악한 일러스트레이션이 범람하고 있음은 두렵고 한심스러운 일이다.

이와 함께 만화의 불량.저질성은 극에 달하고 있다. 주로 일본만화를 복사하거나 모방하여 그려지고 있는 대부분의 현행 만화들은, 본래 의미의 만화가 아닌 드라마 형식의 극화들이 주종으로서 현 사회의 온갖 퇴폐적 양태들에 일본과 서구의 저급한 사이비 문화나 풍조에 뒤섞이어 어린 독자들을 심하게 오염시키고 있다. 이러한 만화의 저질성에 대한 사회 일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 기세는 날로 강해져 가고만 있다. 그리하여 '만화는 곧 어린이 정서를 해치는 것'이라는, 만화의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 생각까지 나타나고 있다.

흔히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전혀 책을 보지 않고 불량만화나 TV 만 즐긴다고 일방적으로 나무란다. 그러나 어린이들도 그들대로의 생각이 있고 주장이 있다. 오늘날 아동도서가 처해 있는 현실을 더욱 명료하게 인식하기 위해 어린 독자들의 꾸밈없는 주장을 요약, 살펴보기로 하자.

어린이들의 주장

필자는 어린이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약 2년(84-85년)에 걸쳐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중학생 600여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읽고 보아 온 동화책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물어 보았다. 질문에 답하는 당사자들은 질문의 방법이나 질문 당시의 상황에 유도되기 쉽다. 이 점을 고려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에게서 미리 약속이나 한 듯 한결같은 내용의 답이 나왔으며, 놀라우리만큼 날카로운 지적들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아동도서란 그저 그런 것 정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는데, 이는 텔리비전이나 다른 오락물 등에 의해 도서에 대한 흥미가 약화된 것이라고 간단히 규정하기 쉬우나, 그보다 책 자체의 결함이 주된 원인임이 드러난다.

국내동화(창작 및 전래)와 외국 번역동화의 비교에서는 90% 이상이 국내동화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는데 전래동화는 '착하면 무조건 다 행복하게 되는 식'으로 내용이 거의 비슷하고 그림도 무성의하며, 외국의 번역동화는 내용과 삽화가 다양하고 흥미롭다고 했다. 창작동화에서는 어려운 문장이나 단어 사용, 틀린 맞춤법을 지적하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또한 많은 어린이들이 앞 부분을 조금 읽다 보면 그 다음은 안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현행 도서들이 새로운 세계와 흥미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그리고 90% 이상의 학생들이 앞으로 나올 동화책에 대한 바램으로써 내용이 새로왔으면 좋겠고, 그림은 좀 더 생동감있고 성의있게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판에 박은 듯이, 마치 국민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듯한 삽화만 그리지 말고, 우리들의 창작력을 위해 여러 가지 특이한 방법으로 개성있는 삽화 구성을 했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어떤 동화책은 삽화를 판화로 했던데, 그런 것은 참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며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학생도 있었다.

국내동화의 경우, 어린이들과 공감대를 갖는 '새로운 인물상' 의 창조가 시급함을 느낄 수 있었고 도서 제작의 성실성 문제가 크게 부각됨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동화책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고, 외국 동화책은 아동교육을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라고까지 말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러한 주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어른들에게 있다.

아무튼 우리의 아동도서와 일러스트레이션이 어린이들의 감각과 얼마나 괴리되어 있고 낙후되어 있는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오늘의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으나, 어른들은 어리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의 주장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동도서의 독자이자 비평가인 어린 독자들은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점 투성이의 낙후된 책을 보고, 그들의 눈에 '그저 그런 것'정도로 보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듯 투명한, 그리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어린이들이 있는 한 우리의 앞날은 밝다.

아동도서에 나타난 여러 가지 기형적 현상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외형과 내용과의 현저한 차이이다. 즉, 외형의 고급화에 비하여 그 원문과 일러스트레이션의 수준은 형편없이 낙후되어 있는 점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편집인, 그리고 인쇄인 등 도서 제작 참여자들 전체가 지나치게 안이한 자세로 임하고 있다. 속된 말로,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눈이 어둡다'는 비유와 같이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나 책임의식은 전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러면 어떤 이유로 이러한 기형적이고 불성실한 도서들이 범람하게 되었는가.

열등의식과 미술계의 무관심

앞서 예시한대로, 우리 아동도서의 질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의 하나는 바로 '어린이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에 종사하는 작가들 스스로가 자기 분야의 작업을 비속하게 보는 데도 있다. 상당수의 작가들이 '어린이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을 순수미술보다 낮은 차원의 '2급 미술'쯤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순수 미술을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 길을 가게 되었다는 식의 낙오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성실한 일러스트레이션의 산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분야를 비속하게 보는 시각은 여타 미술 분야의 작가들 또한 마찬가지인데, 그 원인은 그들의 무자각이나 무관심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간혹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는 작가들도 기껏해야 어린이에 대한 동정적인 자세에서거나 생계를 위한 방편 정도에서 그치게 된다.

해마다 1만 3천여명이라는 엄청난 미술 인구를 배출하는 대학에서도 기껏해야 디자인계 학과에서 과제물로 한두 번 다루는 푸대접을 하고 있다. 이러한 미술교육의 모순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수준으로 볼 때, 어떤 이유도 그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각 조형 장르마다의 벽이 허물어지고 거시적 안목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는 국제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순수회회만 예술의 전부'라는 식의 고루하고 폐쇄적인 사고방식이 지배적이라는 데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린이에 대한 그릇된 인식

아동도서 일러스트레이션의 정체현상을 가져오는 또 다른 이유는 일러스트레이터, 출판인 등 어른들의 어린이에 대한 피상적 인식이다.

어린이는 그저 착하고 순진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인식으로 어린이를 마치 인형같이 다루거나, 자신들의 과거를 회상케하는 대상 정도로 알고 있다. '동심의 세계'에 대해 교육자 이 오덕 씨는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동심은 어른들의 장난감도 아니고, 옛날을 회상할 때 잠기는 늙은이의 그리움의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터전에서 온갖 부정과 역경과 싸우면서 끝내 지켜나가는 순수한 인간 정신이며, 끊임없이 자라나는 선의 마음바탕이며, 온 민족의 어린이와 어른의 마음바다로 확대해 갈 수 있는 정심이며, 문학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키워갈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이다."

따라서 어린이들의 직관력은 때때로 어른의 그것보다 더욱 날카롭기도 한 것이며, 어른들의 선과 악을 양심이라는 투명한 눈으로 간파해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린이 세계의 진실함과 그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린이를 단지 분별력 없는 미숙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최소한의 책임감도 몰각한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일러스트레이션들을 주저없이 어린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 속에 그려진 대표적인 예가 현행 국민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일러스트레이션들이다. 교과서 일러스트레이션의 낙후성 문제는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이제는 마치 획일화된 일러스트레이션의 대명사처럼 지칭되고 있는 정도이다. 미술에 심미안이 없는 사람이 보아도 한 눈에 그 조형의 조악함과 무성의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으며, 당사자인 어린이들도 이 점을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개편 때마다 조형적인 밀도가 퇴보하고 있는 점이다. 저학년 어린이들일수록 도서에 수록된 원문보다 일러스트레이션이 끼치는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레이 아웃 자체가 일러스트레이션 위주로 짜여져 있음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사회 도처에서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외치면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과서는 한 국가의 문화와 교육수준을 대표하는 도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교과서 일러스트레이션 문제야말로 전 미술계와 사회 여론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짚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문제인 것이다.

식민지 잔재의 조형 관념

거의 모든 일러스트레이션들이 그 스타일과 기법에 관계없이 표현된 분위기에 있어서 공통적 양상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동심천사주의적 조형관념'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점은 그 동안의 아동 문학작품들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으며, 출판계 종사자들의 시각이 여전히 고루한 데에 원인이 있다.

어린이를 한갓 유희 대상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은 그 연원이 일제하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의 근대화 과정은 '국권 상실'이라는 치명적인 전통 단절의 상황에서 침략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조작된 제국주의적 논리에서 시작되었다. 일제 침략자들은 영구적 지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음모로서 문화.예술 정책을 주도하였는데, 그 정책의 기본목표는 현실도피의 예술관을 주입, 세뇌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의 자주정신을 말살시키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발생된 '동심천사주의'를 이오덕 씨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민족의 가난과 슬픔을 노래하던 우리의 동요가, 밀려든 일본제국의 겉보기 아름다운 문학 앞에서 결코 고울 수만 없는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을 부끄러워하여 감추려고 했을 때, 참된 우리 민족의 아동세계를 노래하는 양심과 지혜를 잃고 다만 화려한 남의 것에 정신을 파는 결과가 되었다. 아동을 장난감으로 어루만지고 재미있어하는 동심천사주의의 짝짜꿍 동요는 이렇게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아동과는 상관이 없는 넋빠진 어른들의 장난감 문학이었고, 침략자 일제가 이 땅에 피어나기를 원했던 식민지 문학이었다."

리얼리티를 상실한 당시의 아동문학과 함께, 그것을 해석하는 일러스트레이션도 현실에 지친 당시 어린이들에게 현실감이 결여된 몽상적 이미지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려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나약한 조형관념은 수차례의 시대적 변혁을 거치면서 그대로 계승되어 아직도 '어린이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하면, 목가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소타고 피리부는 소년의 모습 같은 류의 소재들을 떠올리는 실정이다. 거기에다 약화사전식 스타일의 예쁘고 고운 형태에 알록달록하고 화사한 색채로 채워지면 곧 '어린이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인 것처럼 인식되어 매너리즘에 빠져 왔으며, 일반인들 역시 그러한 착각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 각계에서 주장하는 '식민지 잔재의 청산'이라는 슬로건은 우리의 아동도서계에서도 이렇듯 절실한 문제로 살아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의 동향

일본은 어린이 도서의 모든 분야에 걸쳐 수준높은 도서들을 선보이고 있으며, 어린이 도서 전문서점이 있을 정도로 선두에 있다. 현재 이 분야는 독립된 장르로서 일반화되어 있으며, 작고한 일러스트레이터의 단독 미술관까지 있어 먼 곳에서까지 관람자의 발길이 줄을 이을 정도로 이 분야의 사회적 관심과 애정이 깊이 배어있다. 그리고 가히 '세계 아동도서의 전시장'이랄 만큼 다른 나라의 우량 도서들은 거의 망라하여 번역, 소개하고 있다.

중국은 조밀한 구성에서 거대한 스케일의 구성까지 실로 다양한 스타일을 변화무쌍하게 구사하고 있으며 인쇄와 지질도 우수한 편이다.

국민소득이 우리와 비슷한 말레이시아의 경우는 정부 산하의 어린이 전문기관이 있으며 해마다 대규모의 도서전도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싱가폴, 필리핀과 더불어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로는 서구지향적 조형스타일을 지적할 수 있다. 타이도 국왕의 특별 지시로 대규모 어린이 백과사전 편찬사업이 벌어지고 있어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 밖의 저개발국으로서 네팔,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스리랑카, 미얀마 등의 나라는 현재 도서의 수준은 많이 낙후되어 있는 편이나, 골치거리인 문맹퇴치를 위해 어린이 교육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지역적 특색이 강하고 신선한 생명력을 보이는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앞으로의 전망이 매우 밝다고 생각된다.

독립한지 몇 년이 채 안된 파푸아 뉴기니아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의 일환으로 어린이 생활 각 분야에 걸친 온갖 종류의 도서 개발사업에 착수하여 조만간 그 기대에 찬 결과가 보여질 전망이다.

우리에게 조금은 낯익은 유럽지역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안정된 기조 위에서 발전되어온 아동문학의 전통을 바탕으로 다양한 표현스타일과 함께 세련되고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미국의 경우는 광범위한 종류와 엄청난 양의 아동도서를 자랑하고 있는데, 유럽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아동도서의 비평풍토가 잘 조성되어 있고, 일러스트레이터를 대상으로 하는 여러 권위있는 시상제도도 운영되고 있다.

그러면 미국의 저명한 일러스트레이터 에즈라 키츠의 칼데코트 상 수상작이며, 미국 그림책의 새로운 반향을 불러 일으킨 <눈 오는 날> 중의 한 장면을 예로 들어, 높은 수준의 도서를 만들고 있는 나라들의 일러스트레이터의 리얼리티가 넘치는 감수성과 표현력, 또 그러한 작품을 예리하게 뚫어 보고 있는 일본의 어린이 도서 전문출판사인 <복음서관>의 발행인 마쓰이의 평을 통해 그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에까지 와 있나 보기로 한다.

에즈라 잭 키츠의 <눈 오는 날>

무대는 뉴욕의 거리, 주인공은 어린 피이터, 그의 집은 결코 잘사는 집은 아니지만 평화스런 가정임이 전편을 통해 느껴지며, 독자들에게 평안한 감을 준다 ---중략--- 빨간 벽면과 대조적인 검은색의 침대살, 천의 질감을 살린 이불과, 각기 다른 질감의 소재를 잘 묶어 그 속에 짜임새있는 데생의 주인공 흑인어린이 피이터를 인상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콜라지의 기법에서 오는 데포르메가 극명하게 이루어져 있으나 그것이 회화적 표현의 질을 약하게 하고 있지 않다.

창 밖의 풍경에 있어서는 하늘과 외벽을 불투명 수채로 보색한 필치가 실내의 극명한 콜라지와 대조적이어서 화면에 입체감을 주고 리얼리티를 강하게 해주고 있다.--중략-- 돌과 철의 덩어리같은 뉴욕, 그러나 거기에 눈이 오면 이 대도시의 인상이 일변한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감수성은 즉각적으로 민감하게 이 자연의 조화에 반응한다. 이러한 어린이들의 감수성이야말로 귀하게 키워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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